여지껏 몰랐던 삼국지에 대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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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이문열은 삼국지(삼국지연의)를 평역하면서 다음과 같은 점에 집중하여 작품을 집필하였다고 한다.

이문열의 삼국지 개인적으로 아직까진 이 버전이 제일 좋다

먼저 중국에서 입수한 삼국지의 모본을 따르되,

시(詩)와 평문(平文)은 가감하거나 이문열 자신의 것으로 대체하고, 필요한 곳은 변형, 재구성하였다.

변형과 재구성을 한 까닭은 '삼국지'에 소설적 감각을 주기 위함이라고 작가는 밝히고 있다.

또 작가는 자신이 곁들인 평문을 통하여 혁명, 권력의 정통성, 전쟁뿐만 아니라, 역사, 철학, 과학까지 모두 해석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원전에는 제갈량의 사후가 책 한 권에 가까운 분량이지만

작가는 그것을 소설적 재미를 위하여 4분의 1로 과감히 요약하였다.

세계각국의 삼국지 - 거의 모든 언어로 집필이 되어 있지 않을까?

정사 '삼국지'와 '삼국지연의'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고대로부터 고도의 문명을 발전시킨 중국대륙. 지금부터 1800년 전의 중국을 지배하고 있던 것은 ' 후한' 왕조.

궁중엔 환관(내시)이 황제를 둘러싸고 관력을 남용하여,

나라의 관직을 매매할 정도로 부패와 혼란이 온 나라를 어지럽게 하였다.

백성은 도탄에 빠지고 굶주린 유민이 대륙을 떠돌게 되었다.

이런 혼란의 와중에 태평도라 불리우는 종교 집단이 나타나,

"한왕조는 끝나고 우리의 시대가 열린다. "고 군중을 선동, 전국 각지에서 후한 왕조에 대한 민란을 일으켰다.

누런 두건을 상징으로 삼은 이들의 반란은 "황건의 난"이라 일컬어졌다.

184년

이미 쇠약해진 후한 왕조로서는 이 난을 진압하기란 불가능했다.

이런 이유로 조정은 각지의 호걸들에게 황건의 난 진압을 요청한다.

난은 진압되었지만 그 결과, 진압의 공을 세운 지방의 호걸들은 점점 위세를 떨쳐 한왕조를 위협하게 되었다.

그들은 각각 자신들의 근거지에서 세력을 구축하여 서로 맞서게 되고, 중국은 분열상태에 이르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가장 큰 힘을 기른 것은 조조였다.

한편, 동남부 양주를 중심으로 큰 영토를 지배하는 손권도 3대째 세력을 기르고 있었다.

여기에, 독립된 영토는 없지만 인품과 덕망으로 유능한 인재들을 거느리고 있는 유비는 빼놓을 수 없는 영웅으로 꼽혔다.

그들의 중국통일을 둘러싼 드라마, 그것이 바로 [삼국지]라는 역사극인 것이다.

삼국지는 셀수 없을 만큼 많은 삽화들이 있다

진수의 '삼국지'는 위의 뒤를 이은 진시대에 쓴 정사이다.

따라서 전체적으로 보아 위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이는 '위서', '촉서', '오서'로 구성된 삼국지 전 65권의 절반에 가까운 30권이 '위서'인 점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기술 역시 '위서'만이 황제의 기록으로 되어 있다.

'위서'에는 따로 본기(제기)가 붙어 있으나 '촉서'와 '오서'의 경우는 유비, 손권 모두 열전에 포함시켜 놓고 있다.

이 역시 위의 정통성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라고 보아 틀림이 없다.

그러나 저자 진수는 위가 아닌 촉나라 출신이다.

후세 사가들은 촉나라 출신인 진수가 삼국지를 편찬하면서 객관성을 유지하였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최대한 촉에 비중을 두었음을 행간에서 읽을 수 있다고 말한다.

나관중의 삼국지연의는 어디까지나 소설이므로 사실을 바탕으로 했다고 하더라도 수많은 픽션이 가미되어 있다.

정사 삼국지와 판이하게 다른 것은 촉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위의 조조는 어디까지나 악역으로, 촉의 유비는 정이 많은 사람으로, 관우는 신의가 두터운 의인, 제갈공명은 초인적인 활약을 하는 것으로 그려진다.

중국 후한(後漢)이 멸망한 후 위(魏)/오(吳)/촉한(蜀漢) 등 3국이 정립(鼎立)했던 시대.

184년

삼국지

황건적(黃巾賊)의 난이 일어나자, 후한 왕조의 권위는 붕괴하여 동탁(董卓)이 뤄양[洛陽]으로 입성하여 환관(宦官)을 주멸하고, 황제의 폐위를 감행하려고 하였다.

이 때문에 동탁 토벌의 군이 각지에서 일어나게 되었다.

산둥[山東]에 있던 조조(曹操)도 189년에 군사를 일으켜 황건적을 격파하고

동탁을 토멸하여 후한의 헌제(獻帝)를 옹립해서 기주목사(冀州牧使) 원소(袁紹)와 화북지방을 양분(兩分)하였다.

양자(兩者)는 202년 관도(官渡)에서 자웅을 결하였으나,

이 싸움에서 승리한 조조는 화북지방의 지배권을 거의 확립하였다.

한편, 형주목사(荊州牧使) 유표(劉表)에게 식객(食客)으로 있던 유비(劉備)는,

현신(賢臣) 제갈양(諸葛亮)의 협력을 얻어 형주를 빼앗아 손에 넣고 오(吳)의 손권(孫權)과 동맹하여 조조의 남하를 저지하였으며, 211년에는 익주(益州)를 공략하여 이 지방을 빼앗았다.

가장유명한 도원의 결의, 적벽대전 삽화

그 후

오(吳)의 손권은 유비와 싸워서 형주를 손에 넣었으며, 거의 양쯔강[揚子江]의 중·하 유역을 세력하에 두었다.

220년 조조의 아들 조비(曹丕)는 후한의 헌제를 강압하여 제위를 양위케 하고, 뤄양에 도읍하여 위국(魏國)이라 칭했다.

그 전년에 한중왕(漢中王)을 호칭하던 유비는, 한의 정통을 계승한다고 칭하여 성도(成都)에 도읍하고, 한제(漢帝) 또는 촉한제(蜀漢帝)라 칭하였다.

손권은 처음에 위의 오왕(吳王)으로 봉해져 있었으나, 222년에는 스스로 연호(年號)를 세우고, 또한 229년 오제(吳帝)의 제위에 올랐기 때문에, 여기에 3국의 분립이 확정되었다.

3국 가운데 화북(華北)에 있던 위는 병호제(兵戶制),둔전제(屯田制),구품관인법(九品官人法) 등을 실시하여, 군사적·경제적 기초를 공고히 함으로써 가장 강력한 국가로 발전하였다.

그러나 촉한은 국토도 좁고 가장 약하였으나, 한의 정통을 계승한 것으로서 중원의 회복을 뜻하여, 수차에 걸쳐 위에 도전하였다.

그 후

위에서는 사마 의(司馬懿)가 중심이 되어 이를 격퇴하였기 때문에 마침내 사마씨가 실권을 장악하게 되었으며,

그의 아들 사마 소(司馬昭)는 263년 촉한을 멸망시킨 공적으로 진왕(晉王)에 봉해졌으며,

265년에는

그의 아들 사마 염(司馬炎)이 위제(魏帝)를 강압하여 제위를 양위받고 진(晉)나라를 세웠다.

이 사람이 서진(西晉)의 무제(武帝)이다.

무제는 280년 오나라를 멸망시키고, 재차 중국을 통일하였다.

'삼국지연의'는 중국 원(元)나라 때의 소설가 나관중(羅貫中)이 지은 장편 역사소설이다.

중국 4대기서(四大奇書)의 하나로, 원명은 [삼국지통속연의(三國志通俗演義)]라 하며,

또한 삼국의 정사(正史)를 알기 쉬운 말로 이야기한 책이라는 뜻에서 [삼국지평화(三國志平話)]라고도 부른다.

진수(陳壽)의 [삼국지]에 서술된 위(魏),촉(蜀),오(吳) 3국의 역사에서 취재한 것으로,

3국이 정립(鼎立)하여 싸우는 이야기는 그 전투의 규모가 웅장하고,

인간의 온갖 지혜와 힘을 총동원하여 치열한 공방전이 되풀이되는 만큼,

옛날부터 중국인들 사이에 흥미 있는 이야기로 전하여 오다가 9세기(당나라 말기)경에는 이미 연극으로 꾸며진 흔적이 있고, 송대(宋代:11∼13세기)에는 직업적인 배우까지 나왔다.

삼국지

이것이 책으로 엮어진 것은

원나라 지치연간(至治年間:1321∼23)에 그림을 붙여 간행한 [전상삼국지평화(全相三國志平話)](3권)이며, 이것은 현존하는 최고본(最古本)이다.

이 책은 일종의 강담용(講談用) 대본 같은 것이어서 문장이 조잡하고 유치하였다.

그러나 원나라 때에는 이 평화(平話)를 바탕으로 하여 많은 희곡이 만들어졌으며,

나관중은 이 평화를 철저하게 개작(改作)하고, 많은 사실(史實)을 곁들여 이 책을 완성시켰다.

원본은 전하지 않고, 현존하는 최고본은 1494년의 서문(序文)이 있는 홍치본(弘治本)으로,

이 책도 실은 1522년에 간행한 것이다. 24권 240절(節)로 나누어 기술하였으며 이것이 가장 원형(原形)에 가까운 것으로 생각된다.

그 후

분권(分卷)을 없애고, 2절(節)을 1회로 하여 모두 120회로 만들었다.

청(淸)나라 때는 모종강(毛宗崗)의 개정본이 나와, 이것이 다른 책을 압도하고 정본(定本)이 되었다.

이야기의 내용은 대략 전·후반으로 나누어지며,

전반에서는

유비(劉備:玄德)·관우(關羽)·장비(張飛) 3인의 결의형제를 중심으로 나중에 제갈 공명(諸葛孔明)이 가담하게 되는데,

절정은 유비와 손권(孫權)의 연합군이 조조(曹操)의 대군을 화공(火攻)으로 무찌르는 적벽(赤壁)의 대전이며,

이것이 위(魏:조조)/오(吳:손권)/촉(蜀:유비)의 3국이 분립(分立)하게 되는 원인이 된다.

후반에서는 관우,유비,장비가 연이어 죽은 다음 제갈 공명의 독무대가 되고,

공명이 6차에 걸친 북정(北征)에서 병사(病死)하는 [추풍오장원(秋風五丈原)]의 1절이 절정을 이루게 된다.

 

소설의 주요인물은 유비 관우 장비 등 3인과 공명이지만, 조조의 성격도 잘 묘사되어 있다.

가장 생기가 넘치는 것은 관우와 장비 두 사람이며,

특히 장비의 순진하고 솔직한 성격은 중국 대중의 많은 사랑을 받는다.

무용(武勇)과 지모(智謀)로 이어지는 전투의 기술(記述)이 태반을 차지하고 있으나,

이야기의 전개가 적당한 템포로 진행되고,

독자의 흥미를 이끌어 가는 수법이 매우 뛰어나 중국의 많은 역사소설 중에서 가장 훌륭한 작품이다.

한국에서도 예부터 대중적인 읽을거리로 널리 읽혀져 왔으며,

특히 그 속에 담긴 유비 현덕을 중심으로 한 한실(漢室)에 대한 충성이라든가,

공명의 지략, 유비,관우,장비의 결의 등은 유교적 이념을 국시(國是)로 삼았던 조선시대에는 크게 환영을 받았다.

그 중에서도 관우의 장한 의기와 절개는 민간신앙으로까지 발전하여 관제교(關帝敎)가 생겨나고,

관제묘(關帝廟)가 곳곳에 세워지기까지 하였다.

신문학(新文學) 이전에는 한문으로 된 원본이 수입되어 읽혔으나 그 후 수많은 국역본이 나와 널리 대중의 인기를 차지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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